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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재배 역사  
<옛그림을 통해서 본 난의 재배 역사>
우리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난을 재배해온 흔적이 엿보이지만 실제로 언제부터 재배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옛 문헌과 그림 그리고 각종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나라의 난 재배 역사를 정립할 수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보관되어 있는 옛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된 난 그림은 고려말에 윤삼산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춘란 그림은 추사 김정희선생과 석파 이정응, 소호 김응원이 잘 그렸고, 건란은 원정 민영익이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선조때 이징(1581~?)이 그린 춘란도는 현존하는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가 묵난화로서 사실적인 그림이라기 보다는 문인,묵객들이 즐기던 문인화로서의 상징성이 강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징의 춘란 그림은 문인화이면서도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표현기법으로 그린 것임을 엿볼 수 가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그린 묵난화 중에는 작가의 이름과 연대가 표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춘란의 뿌리가 지면위로 뻗혀나오게 그린 노근난도가 있다.
이것은 자생 상태에 있는 춘란의 생태적 특징을 잘 나타낸 그림이며, 종자가 맺힌 모양도 사실대로 그려놓은 것이 특징적인데, 이 그림은 문인화로서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실물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임을 알 수 가 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난을 잘 그렸다는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추사선생이 제주도에 유배되어 9년을 머무는 동안 난과 직접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추사선생이 제주도에서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다.

"산속에서 해매다가 붉은 꽃과 소심을 구했다. 한 포기를 보내고 싶으나 길이 멀어서 보내지 못하였기에 찬이슬 맞고 향기가 줄어들도록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추사선생이 난을 친 그림 속의 화제에는 "마침 뿌리째 있는난초가 있음으로 그리게 되었다"고 사실적 문구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말에는 난분에 식재된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식재 용기가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난재배 역사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한점이 남아 있다.
고려말엽에 사대부집 부녀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계분경도는 사계절을 나타내는 4폭짜리 자수작품으로써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화분에 심겨져 꽃이 핀 난분과 연꽃, 소나무분재,화병에 꽃힌 매화나무가지 등이 더불어 사실적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볼때 당시의 난재배 실상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특히 규수들에 의하여 난분이 수놓아진것은 일반 묵화와는 다른 의미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의 난재배 역사가 고려시대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고전문학작품을 통해서 본 난재배 역사>

신라말엽의 대학자이었던 고운 최치원선생은 "미인의 덕이 란혜처럼 꽃답다 - - "라고 하여 왕비의 덕을 난혜에 비유하여 쓴 글이 있고, 조운흘(1332~1404)이 신라와 고려시대의 유명한 한시들을 모은 삼한시구감이라는 책에는 명종때 사람인 김극기의 싯귀가 실려 있다.

"뜰에 핀 국화는 가을을 머물 게 하고
비단결 같은 가지는 비에 씻겨 싱싱하다.
가는 꽃술은 가을 정취를 더해 주는데
그 좋은 난초는 이미 시들어 파리하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누구와 친구 할거나
차라리 길가의 갈대를 따라서 - - - "

라고 읊었는데 이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난에 관한 문구중에서 가장 앞선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이규보(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는

"방으로 들어가니 난초 향기가 풍긴다
붓잡고 시한 수 휘두른 다음
수 없이 권하는 술에 듬뿍 취했네"
라고 표현하여 방 안에 꽃이 핀 난분에 있어 난향이 그윽함을 표현하고 있다.
최자(1188~1260)도 이런한 글귀가 나온다

"뜰의 난초는 옛 향기를 같이 하였고 - - - "라고 표현되었던 바, 우리나라의 기후적 여건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 난을 뜰에 심어서 길렀을 리는 없을 것으로 판단 되지만 꽃이 핀 난분을 뜰앞에 두고 그 향기를 감상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곡(1298~1351)도

"난초는 향기로서 스스로를 불태웠고, 구슬은 연못에 잠기어 아는 이가 없구나 - - -"라고 하였고

정몽주(1337~1392)는

"손수 그윽한 산간둑에 있었더니 의의하게 멀리 향기가 나있더라" 라고 표현된 글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난향이 문인들로 하여금 음송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으려니와 이들의 지위나 품격으로 미루어 보아서 난을 곁에두고 기르면서 아름다운 향기를 감상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승인(1349~1392)의 난시에는

"난 언덕 밑을 걸으니 훈훈한 향이 풍기네
이미 이 좋은 꽃을 재배하니
가시엔들 어찌 찔리랴 "

그리고 이색(1328~1396)도

"난을 내가 사랑하여
갑자기 두 눈이 밝아지네
엷고 푸른 잎은 흐트러져 있고
새로 피어나는 싹은 엷게 푸르구나
고요히 앉아 향기 오기를 기다리니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네 - - - -"라고 쓰여있다.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이었던 권근(1352~1409)은

"무성하다 저 난초
잎마저 길고 기네
향기롭다 저 난초
꽃조차 아름답구나 - - -"라고 하였고

길재(1353~1419)는

"난초언덕 돌아가니 한줌 향기 흩날린다.
재배하여 얻으니 어찌 가시가 상하게 하리
꽃은 절로 봄,가을이 달라
봉오리는 이슬에 자라
향기에 젖으니 유익한 줄 알겠고
마음속에 천광이 발동하네"라고 하였다.

세종과 성종시대 사람인 김종직(1431~1492)은 난향을 일컬어 국향이라고 표현한 것이 특이 하다.

이러한 표현은 자주 쓰이지 않는데 김종직 이후 조선말기에 이건창(1852~1898)이 쓴 명미당집에도 난향을 '국향'이라고 한것을 볼 수 가 있다.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들 이외에도 난에 관해서는 매창(,1513~1550)이나 허난설헌(,1563~1598)등과 같은 역대 여류 시인들이나 휴정(,1520~1604)이나 유정(1520~1604)같은 고승들의 문학 작품속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또한 조선말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은 난을 숭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적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난에 관해서는 신라말엽부터 언급되어져 왔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난의 분포와 종류에 관한 기록>

우리나라의 고문헌 중에서 난의 실체와 분포,재배에 관하여 사실적으로 설명해 놓은 경우는 세종31년(1449)에 완성된 청천 강희안(1417~1464)선생의 양화소록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란과 혜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분에 옮긴 뒤에 잎이 점점 짧아지고 향기도 좋지 않아서 국향의 뜻을 잃고 있다. 그러므로 꽃을 보는 사람들이 심히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호남연해의 산에서 난 것은 품종이 좋다.
서리가 온뒤에 뿌리를 다치지 않게 제자리 흙으로 싸주고 옛법대로 하여 분에 심는 것이 좋다. 초 봄에 꽃이피거든 - - -)라고 하였다.
여기에 쓰여진 난이란 호남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춘란에 관한 기록이다.

한편 1530년에 증보된 신동국여지승람의 권 31 함양군 조에는 {화장산재군남 15리 산중난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식물 분포, 지리학적으로 미루어 볼때 한란이나 건란과 같은 혜가 경남 함양지방의 산에서 자랄 리는 없고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에서 흔히 자라는 춘란이라고 생각된다. 이 지역을 답사하여 조사해본 결과 춘란이 드물게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선조시대 한국의 역사, 지리, 풍속, 인물, 초목 등을 한자의 음으로 분류하여 편찬한 권문해(1534~1591)의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책에서는 양화소록과 동국여지승람의 내용 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다. 1715년에 간행된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일경일화성인 것을 란으로 취급하였고 일경다화성인 것을 혜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황산곡의 죽기와 본초강목,기문등, 중국책을 인용하였고 (본국란혜 - - - 생)이라고 기록한 것은 양화소록을 그대로 인용 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1798년에 간행된 재물보에서도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1800년대초에 농업을 위주로하여 방대하게 편찬된 백과사전이며 본이지 를 비롯하여 이정표에 이르기까지 16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간행된 서유구(1764~1845)의 림원십육지에는 난의 종류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난을 자,백,잡류로 구분하고 오란,금릉변,하란등 17종류, 그리고 백류를 시란,어침난 주란, 건란, 벽란 등 24종류,잡종류는 세란,묵란 항란, 백란, 춘란, 혜란, 은란, 풍란 등 14종류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들 이름은 중국서적 금장난보와 왕씨난본등에서 인용한 것으로 고찰 되었다.

또한,「(동국란화),자란,동난화품류~ 」라고 하여 앞서 기술한 양화소록이나 대동운부군옥,산림경제 등의 내용과 같으나 이 시대에는 중국산 또는 일본산의 난초가 대마도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흔적이 나타나 있고 특히, 나도풍란(대엽풍란)과 풍난이 류구풍란과 더불어서 처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책이 간행될 무렵에 이미 중국춘란의 품종들이 구분, 명명되어서 '왕자'나 '송매',"소타매"등이 알려져 있던 시기이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1681년에 간행된 화단강목과 화록 (1765년발행)에 춘란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우리나라보다는 시대적으로 상당히 늦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도 그러하였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난에관한 기록이 혼란을 일으켰던 시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때 동경이었던 경주의 내력을 적은 책으로서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에 「 물가의 난초는 곳곳에 있도다 - - -」라고 적혀 있다.
이는 난의 생태상 물가에서 자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조재삼의 남송잡식 난보춘추에는 황산곡의 란혜구분법을 인용하여 기록하긴 했으나 여기에서 말하는 난은 오늘날에도 한약제로 쓰이고 있는 택난(등골나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위(1760~1828)의 조수충어초목명에 기록된 것들은 모두 택란이었는데 택란은 중국의 한나라 이전에 난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져 왔었으며 산란이라고도 불리었다.
소위 동양난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온대지방에서 자생하는 Cymbidium류 이외에도 석곡(Dendrobium moniliforme)을 보면 석란이라고도 기술 하였다.
이행(1478~1534)의 용제집에는 「석란. - - -」이라고 쓰여 있어서 석곡은 바위 위에서 자라는 생태특징에 관해서 언급된 바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도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석곡은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한약제로 널리 이용되고 있는 난과식물로서 이미 성종(1469~1494)시대때부터 기록되어진 식물이다.

한편 정조시대에 서술되어 훗날 손자들에 의하여 출간된 여암 신경준(1712~1781)의 여암유고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제주에만 일경다화성인 혜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제주한란에 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신경준은 영조51년(1775)에 제주목사로 부임한뒤 수년간 제주도에서 지낸 바 있었다.
또한, 이 책에는 서울의 돈의문 밖에 사는 최씨라는 사람이 지금의 황해도 서흥이라는 곳의 산중 벌판에서 캔 희귀한 난 두포기를 주었다고 쓴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일경일화성인 춘란과 일경다화성인 한란을 식별할 수 있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만 혜로 취급되어온 한란이 자생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암유고의 내용중에서 혜는 한란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선조34년(1551)에 저술된 김상헌(1570~1652)의 남차록에는 제주의 토산물로써 밤, 귤, 유자 및 석곡과 더불어 영릉향이라고 쓰여 있다.
정의현의 흥노리라는 곳은 지금의 서귀포시 서흥리이며 호근뇌리는 현재의 호근리인데 이 지역에 오늘날까지도 자생한란의 주된 분포지역이다.

또한 잡동산이에는 「혜금영릉향야 」라고 쓰여 있어서 영릉향이 곧 한란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1704년 제주의 지방지로 간행된 남신박물의 지약부분에 영릉향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기록에 의하면 영릉향이란 한약제로 쓰이는 콩과식물에 딸린 풀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기록된 영릉향이 과연 한란을 지칭한 것인지는 단정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영릉향의 실체파악 여하에 따라서는 한란에 관한 우리나라의 최초 기록이 시대적으로 훨씬 앞당겨 질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난의 재배 및 이용에 관한 기록>

난의 재배와 감상법에 관하여 처음으로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은 세종시대의 문신, 강희안이 저술한 양화소록이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이보다 100여년 앞서서 이제현은 「내가 여항에 손님으로 머물때에 어떤 사람이 난초를 화분에 심어서 선물로 주었다. 이것을 책상위에 놓고 - - 」라고한 내용이나 1397년 발간된 정도전 (?~1398)의 삼봉집에는「내가 송경에 있을적에 날마다 선생의 집에 갔는데 좌우에 다른 물건은 없고 오직 거문고와 책상만이 있었으며 옆에는 작은 화분이 있어 송, 죽, 매, 난을 그 속에 심고 완상하며 즐겼다 - -」라는 내용이 있다.
첨화제집 에는 「약수현에서 손극겸이 화목을 잘 기른다는 말을 듣고 서교수 지인과 남훈도 수명과 이생원과 함께 그의 화원을 찾으니 키작은 반송은 장막같은데 국화 수십 종류와 난초 예닐곱떨기가 있었다. - - -」라고 하여 소나무, 국화와 더불어 난초를 재배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난을 정원에 심어놓고 관상했던 기록도 남아 있는데 전남 담양에 있는 정원을 설계한 목각판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당초 1500년경 처음으로 정원을 조성할 당시에는 난이 심겨있지 않았으나 1755년경에 만들어진 목각판에는 동백나무, 측백나무와 더불어 제월당 부근에 난이 심겨진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심겨진 난은 추측컨데 남부지방의 야산, 특히 전남지방의 야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자생춘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정원에다 직접 난을 심어 놓고 기르면서 관상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의 문헌적 고찰을 통하여 볼 때 우리나라의 난재배는 1300년대 중엽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난을 실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섰다.
1283년 일연(1206~1289)이 쓴 삼국유사에는 석탈해왕이 왕비를 맞아 들일 때 왕이 직접 명령하여 손님들을 안내하게 하고「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서 편안히 머무르도록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방에 5~6명씩 두어 편히 쉬도록 하라.
그리고 난초로 만든 술과 혜로 만든 술을 주고 - - -」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일찌기 신라시대의 궁궐에서는 란과 혜의 아름다운 향기를 이용하여 술을 빗기도 하였고, 이러한 술은 특별히 귀빈을 접대할 때에만 이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책에는 차를 만들어 마실 때 난, 귤, 매화 등의 꽃이 반쯤피어서 꽃술의 향기가 온전한 것을 따서 차와 섞어서 마신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난은 오랜 옛날부터 차로 만들어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런가하면 향약집성방 향약본초 각론에 기록된 것을 보면 석곡은 약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약효, 별칭, 채취시기 등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고, 1610년에 완성된 허준의 동의보감에도「석곡의 성질은 평하고 단맛이 나며 무독한데 허리와 다리의
연약함을 다스리고 허연을 보하며 - - - 수방의 바위에 난다. 열매가 가늘고 누르니 상회탕에 담그면, 금색이나고 줄기의 모양이 메뚜기 다리와 같은 것이 좋고, 보통 금차석곡이라고 하며 술에 탕.증하여 약으로 한다 」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서적인 본초, 입문, 단심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말엽인 890년경에 지은 최치원의 한시구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신라시대(57~936AD)에는 난초을 이용한 술과 차를 만들었다. 난을 화분에 심어서 재배,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중엽(12세기)이후부터 이다. 난의 재배법 및 자생 춘란의 분포에 관한 것은 1449년에 쓰여진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조시대 (1775~1781)에는 호남지방의 정원에 난을 심어서 가꾸고 관상 하였다.
제주한란은 1780년대에 쓰여진 신경준의 여암유고에 처음으로 기록 되었고 석곡은 약용으로 쓰였는데 성종시대(A.D 1469~1494)에, 그리고 나도풍난과 풍난은 1800년대초 서유구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묵난화는 1300년대부터 문인, 묵객들에 의하여 즐겨 그려지기 시작하였고, 1500연대 이징이 그린 춘란도는 현존되고 있는것 이어서 고서화를 통해서는 당시의 난재배상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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